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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태풍 라이 2021 (재난과 음식, 공동체 회복력, 기후 재난 대비)

story70233 2026. 1. 30. 12:34

슈퍼 태풍 라이 2021

2021년 12월 16일, 필리핀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홉 번의 새벽 미사 중 첫 번째 미사가 시작되는 기쁨의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날 초강력 태풍 오데트(국제명 라이)가 비사야스, 민다나오, 남부 루손을 강타하며 축제 분위기는 순식간에 참혹한 재난으로 바뀌었습니다. 1,300만 명이 피해를 입고 400명 이상이 사망한 이 태풍은 필리핀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팔라완주 산비센테 마을에서는 재난이 단순히 집과 생계의 파괴가 아니라 일상의 붕괴였음을 음식을 통해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재난과 음식: 닐루팍과 알루그바티가 말하는 생존의 의미

태풍 오데트 이후 산비센테 주민들의 식탁은 극적으로 변화했습니다. 전기가 필요 없고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드는 닐루팍(덜 익은 바나나와 갈아낸 신선한 코코넛)이 가장 빠르게 만들 수 있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영화 제작자 출신의 이주민 민다는 2013년 태풍 욜란다(하이얀) 당시 타클로반에서 사진작가 폴라 브론스타인의 보조로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집이 강타당했을 때는 "마치 우리에게도 마지막 순간이 온 것 같았다"고 회상합니다.
민다 가족이 비축해 둔 알루그바티를 곁들인 정어리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 '위안의 음식'으로 기능했습니다. "이건 제게 위안이 되는 음식이에요. 남편과 싸울 때 남편이 이걸 해 주면 머리가 맑아지거든요"라는 민다의 말처럼, 재난 속에서 평소와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가족에게 일상의 연속성을 되찾아주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는 재난을 '음식으로 읽는' 프레임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줍니다. 태풍의 규모나 피해 통계만으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전기 없이 만들 수 있는 음식의 선택, 위안의 음식을 비축하는 행위, 노체 부에나(크리스마스 이브 만찬)를 포기하거나 지켜내는 결정 같은 장면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농부 부부인 페를리츠와 노랄린의 경우, 태풍으로 갓 싹이 튼 어린 벼 이삭(보길랴)이 있던 논이 홍수에 휩쓸려 생계가 파괴되었습니다. 하지만 쌀을 비축해 둔 덕분에 당분간 버틸 수 있었고, 이웃끼리 음식을 자주 나누는 상호 협력 덕분에 주식은 대부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페를리츠와 노랄린이 민다와 JP에게 쌀 10포대를 주고, JP가 자신의 농장에서 재배한 바나나를 페를리츠에게 주는 장면은 음식을 통한 공동체 연대의 구체적 실천이었습니다. 반면 평소 크리스마스 이브에 과일 샐러드, 판싯, 스파게티로 구성된 노체 부에나를 준비하던 노랄린은 "별거 아니었어요. 그냥 집을 정리하고 싶었을 뿐이에요"라며 축제를 포기해야 했던 상실감을 드러냅니다. 재난 속에서 음식은 불평등을 드러내는 영역이기도 했습니다.

공동체 회복력: 딸의 방에서 시작된 구호 네트워크

태풍 오데트 이후 산비센테에서 가장 놀라운 현상은 민다 가족의 딸 타나의 방이 마을 구호 활동의 중심지가 된 사건입니다. 광범위한 정전 속에서 몇 킬로미터 반경 내에서 유일하게 휴대전화 신호가 잡히는 곳이 2층에 있는 딸의 방이었기 때문입니다. 민다는 "주님께서 우리 집에만 마을에서 유일한 신호가 잡히게 하셨는데, 어떻게든 방법을 찾지 않겠습니까? 마치 우리 집 지붕 위에 별이 떠 있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회상합니다.
민다는 주로 페이스북을 이용해 가족, 친구, 예전 직장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도움의 손길을 보냈습니다. 과거 해안경비대 장교였던 남편 JP의 인맥을 활용하여 국내외 각지의 기부 물품을 대형 선박에 실어 운반했고, 지역 정부·사업가·자원봉사자들이 힘을 합쳐 구호 물품을 배포했습니다. 이는 공동체 회복력이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연결망·연락처·신호가 잡히는 한 칸의 방·쌀 10포대·트럭 한 대 같은 디테일에서 나온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주날린과 남편 냅 역시 자신들의 철물점 트럭을 이용해 구호 물품을 전달하고, 개인 저축으로 식료품을 구입하며, 사업체에서 일하는 가족들의 주택 수리비를 지원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냅의 형제자매들도 지원을 보냈습니다. 이처럼 사회 계층을 초월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자세, 디지털 기술을 통해 사회적 자본을 동원하는 능력, 지역 사업주들이 공익을 위해 자산을 활용하려는 의지, 그리고 강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상호 부조 활동은 재난 대응의 핵심 역량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웅 서사'에는 우려되는 지점도 있습니다. 신호가 잡히는 집이 없으면, 인맥이나 트럭이나 해외 네트워크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좋은 사람이 있어서 버틴다"는 구조는 재난이 반복될 때 공동체를 계속 소진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도·재정·계획이 '대비' 단계에서 구축되는 것이 더욱 핵심적입니다. 노랄린과 그녀의 농가 출신 여성 친구들이 재난 회복력 강화를 위해 여성들을 위한 대안적 생계 수단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있는 시도는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기후 재난 대비: 데이터 문해력과 '더 나은 재건'의 과제

산비센테 주민들은 태풍 오데트의 심각성을 "태풍에 대한 경험 부족" 탓으로 돌렸습니다. 팔라완이 필리핀의 "태풍 벨트" 밖에 있다는 인식 때문에 강력한 폭풍에 적절히 대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날린은 태풍 상륙 3일 전부터 뉴스를 주시하며 강가에 사는 가족들에게 경고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냥 태풍일 뿐이야, 우리는 더 강해"라며 가볍게 여겼습니다. 민다가 위성 사진을 보여주자 주날린이 깜짝 놀랐다는 장면은, 주민들이 데이터 활용 능력이 부족하여 위성 사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경보 시스템이 있어도 문해력·접근성·교육·신뢰가 없으면 실제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는 정보를 '가진 것'과 '쓸 수 있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는 현실적 문제입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태풍은 더욱 강력해지고 강풍과 폭우를 동반하며 이동 속도는 느려져, 취약 지역 주민들은 이처럼 강력한 폭풍에 제대로 대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산비센테 주민들은 이 지역에서 전례 없는 위력을 자랑하는 태풍 오데트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필리핀의 지리적 특성은 기후 변화와 재해에 대한 취약성의 한 측면에 불과합니다. 재해 취약성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들은 분명히 인간의 통제 범위 내에 있습니다. 급속하고 계획성이 부족한 시장 주도형 도시 개발, 사회적 보호 장치 부족, 재해 관리의 수평적·수직적 협력 부족, 재해 관리 자원의 엘리트 독점, 생태 위기 최전선에 있는 소외 계층의 의사 결정 참여 부족, 그리고 대비보다는 대응에 치중한 재해 관리 등이 피해를 키웠습니다. 이는 지리적 조건만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이 취약성을 만든다는 중요한 통찰입니다.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은 모두가 말하지만, 가난한 지역일수록 당장 지붕을 덮는 게 먼저이고, 규격과 기준을 지키기 어려우며, 건축자재와 기술 접근성이 낮고, 지원이 단발성인 경우가 많아 결국 원래보다 취약한 형태로 다시 지어지기 쉽습니다. 파손된 지붕의 규모는 마을의 건축 환경, 특히 주택 부문의 취약성을 보여주며, "더 나은 재건"이 피해 지역 사회와 함께 정의되고 마을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시사합니다. 또한 일부 주민들이 지적한 고형 폐기물 관리 관행의 일관성 부족으로 인해 태풍 이후 특정 수역으로 플라스틱이 넘쳐흘렀다는 점은, 부실한 폐기물 관리가 향후 재난의 결과를 악화시킬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태풍 오데트는 재난이 단순히 물리적 파괴가 아니라 일상의 단절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음식을 통해 재난을 이해하는 것은 위기 속에서도 연속성을 유지하는 데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드러냅니다. 공동체의 회복력은 디테일에서 나오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제도적 대비가 필수입니다. 기후 변화 심화 속에서 데이터 문해력 향상, 충분한 대비, 지속 가능한 복구 체계 구축, 그리고 취약계층의 참여를 보장하는 재난 관리 전략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출처]
San Vicente: Super Typhoon Rai 2021 / Earth Observatory of Singapore: https://earthobservatory.sg/news/blog/san-vicente-super-typhoon-rai-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