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이 되면 자꾸만 생각나는 책이 있다. 이유를 묻는다면 딱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냥 손이 간다. 무심히 쌓인 눈처럼 조용하고, 입김처럼 금방 사라질 것 같기도 한 문장들. 한강의 '흰'은 그런 느낌이다.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인다. 읽고 나면 무언가를 이해했다기보다, 잠깐 멈춰 서 있었다는 기분이 남는다. 문장이 몸 안에 오래 머무는, 그런 책이다. 이 글은 '흰'을 다시 펼쳐 읽은 어느 겨울날의 기록이다. 잘 정리된 분석은 아니다. 그냥, 천천히 오래 남은 감정들. 그리고 그 감정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던 이유에 대한 개인적인 메모에 가깝다.
흰색, 혹은 부재를 말하는 방식
『흰』에서 ‘흰색’은 단지 색이 아니다. 생명이 닿았다 사라진 자리. 아주 오래된 상실이 남긴 흔적. 붕대, 눈, 소금, 모유 같은 단어들이 이어질 때마다 묘하게 서늘해졌다. 따뜻하거나 아름답다기보다는, 말 한마디 없는 방에 혼자 앉아 있는 기분에 가깝다. 그 침묵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더 오래 머물게 된다.
한강은 감정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그 감정이 지나간 자리를 남겨 놓는다. 설명이 없어서 처음엔 조금 막막했는데, 이상하게도 읽다 보면 그 빈자리가 정확하게 느껴진다. ‘죽지 않은 자는 끝내, 죽은 자에게서 물러선다.’는 문장은 처음 읽고도 바로 넘길 수가 없었다. 차갑게 적힌 문장인데, 왜인지 모르게 오래 따뜻했다.
흰색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말 대신 이미지로, 감정 대신 온도로. 빠르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한 문장씩 천천히 넘기다 보면 문장 뒤편에서 조용히 감정이 밀려온다. 이건 소설이라기보다는, 혼잣말을 엿듣는 느낌에 가깝다.
계절과 문장이 겹칠 때
'흰'을 읽기 좋은 계절은 분명히 겨울이다. 손끝이 자주 갈라지고, 창밖이 지나치게 밝거나 반대로 너무 어두운 날. 그런 날, 조용한 방에서 이 책을 펼치면 글자가 아니라 숨결처럼 느껴진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할 때가 특히 그렇다.
한강의 문장은 여백이 많다. 말보다는 멈춤이 많고, 그 사이에 독자가 들어갈 틈이 생긴다.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 한쪽을 살짝 건드리는 틈 같은 것.
'흰'은 서사가 거의 없다. 짧은 글들이 모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조각들이 묘하게 이어진다. 감정이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다. 읽다 보면 문장 사이에서 자꾸 개인적인 기억이 튀어나온다.
예전 어느 겨울, 우유를 쏟고 난 아침이 떠올랐다. 아무도 없던 부엌, 바닥에 퍼지던 흰색. 특별한 사건도 아니었는데, 그 장면이 유독 선명했다. '흰'은 그런 기억을 불러낸다. 이유 없이.
겨울에 꼭 필요한, 한강 책 '흰'
'흰'은 쉽게 잊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읽는 동안은 오히려 잔잔하다. 큰 감정의 파동은 없고, 눈물이 나지도 않는다. 다만 읽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멈춰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치 온 세상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날처럼.
이 책은 무엇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자기 안의 기억을 꺼내게 만든다. 책을 덮고 며칠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내가 반복해서 읽었던 구절들이, 결국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던 감정들을 건드렸다는 걸.
'흰'색은 색이 없는 게 아니라, 모든 색을 덜어낸 상태라고 한다. '흰'도 그렇다. 말은 적지만, 그 적음 안에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겨울에 꼭 필요한 책이라는 말이 흔하긴 하지만, '흰'은 그 표현이 크게 어색하지 않다. 말이 줄어드는 계절에, 말 대신 곁에 두기 좋은 책. 문장보다도 문장 뒤에 남는 여백이 오래 기억된다.
특별한 이유 없이 다시 펼치게 되는 책. 그냥 겨울이라서. '흰'은 그런 식으로 곁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