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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 ‘모모’ 소설 해설 : 회색신사와 시간의 진실

by 달려라피터팬 2025. 12. 29.

미하엘 엔데 ‘모모’ 소설

 

 

'모모'를 다시 집어 들었을 때, 생각보다 손이 쉽게 움직였다. 오래된 책이라 종이와 먼지 냄새가 섞인듯 했고, 그마저도 괜히 반가웠다. 동화라서 금방 읽히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문장은 가볍지만, 읽고 나면 몸의 속도가 조금 느려진다. 시간을 아껴 써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잠깐 멈추고 싶어진다. 회색신사, 시간저축은행, 그리고 모모라는 아이. 예전에 읽었을 땐 그냥 설정으로만 보였는데, 지금은 자꾸 현실 장면들이 겹쳐 보였다. 이 글은 분석이라기보다, 읽는 동안 계속 마음에 걸렸던 장면들을 느슨하게 붙잡아 둔 기록에 가깝다.

회색신사 : 시간을 훔치는 존재

회색신사들은 처음부터 위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투는 공손하고 논리는 깔끔하다. “시간을 절약하세요.” 이 문장, 너무 익숙해서 잠깐 웃음이 나왔다. 회사에서, 광고에서, 일상 곳곳에서 늘 듣던 말이니까.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대화를 줄이고, 놀이를 미루고, 쓸데없다고 여긴 감정들을 정리한다. 그렇게 하면 삶이 더 단단해질 거라 생각하면서. 그런데 묘하게 다들 지쳐간다. 말수가 줄고, 얼굴이 굳는다. 바쁘긴 한데, 살아 있다는 느낌은 옅어진다.

회색신사들이 피우는 담배가 사실은 사람들의 시간이라는 설정이 있다. 처음엔 상징이 너무 직설적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읽을수록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하루, 누군가의 여유, 누군가의 망설임 같은 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느낌.

이 장면을 읽다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습관처럼 화면을 확인하다가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도 모르게 이미 시간을 저축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모 : '듣는 존재'가 가진 힘

모모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다. 끼어들지도 않고, 결론을 내주지도 않는다.

생각해보면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 중간에 판단하지 않고, 조언을 덧붙이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리는 것. 나도 잘 못한다. 그래서 더 인상 깊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모모 앞에서 조금씩 변한다. 말의 속도가 느려지고, 표정이 풀린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 시간 자체를 아까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한 시간처럼 받아들인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예전에 친구와 카페에 앉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던 날이 떠올랐다. 특별한 대화도 없었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던 기억. 이유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미하엘 엔데 '모모' 소설 : 시간의 진실

마이스터 호라가 등장하는 부분부터 공기가 달라진다. 설명이 많아질 법한 장면인데도, 분위기는 이상할 만큼 차분하다.

“시간은 생명이다.”
이 문장을 읽고 잠시 책을 덮었다. 단순한 말인데, 바로 이해되진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오래 남았다.

우리는 시간을 관리하고, 쪼개고, 아끼는 데 익숙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시간들은 대부분 관리되지 않은 순간들이다. 아무 일정도 없던 오후, 목적 없이 걸었던 길, 그냥 멍하니 있었던 시간들.

모모가 시간의 꽃을 지키는 장면은 아름답다. 동시에 조금 쓸쓸하다. 현실에서는 그런 시간이 너무 쉽게 사라지니까. 그래서 더 애써 붙잡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고 나서 바로 삶이 달라지진 않았다. 여전히 할 일은 많았고, 하루는 빠르게 흘렀다.

다만 아주 작은 변화는 있었다. 대화를 서둘러 끝내지 않으려고 했고, 굳이 채우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그냥 비워두기도 했다. 잠깐 창밖을 보는 시간 같은 것들.

『모모』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지금 이 시간은 정말 내 시간일까.

그 질문이 가끔은 귀찮고, 가끔은 고맙다. 아마도 이 책은, 그렇게 삶 한쪽에 오래 남아 슬쩍 고개를 내미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