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도 빛나는 존재 (천선란, 상실, 생명)

by 달려라피터팬 2025. 12. 11.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 천선란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 천선란

 

천선란 작가의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는 낯선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 숨 쉬는 존재들의 마음을 아주 자세하게 비춰주는 소설집이다. ‘상실’과 ‘고립’이라는 말이 주는 차가운 느낌과 달리, 책을 읽다 보면 그 안에서 어떻게 삶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지 조용히 따라가게 된다. 가장 외진 곳,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자리에조차 아직 꺼지지 않은 생명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천천히 보여준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겉으로는 별 사건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인데도, 마음속에서는 울림이 계속 이어져서, 쉽게 페이지를 넘기기가 아까웠다.

상실의 공간에서 피어나는 문장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라는 제목만 들어도 이미 풍경이 그려진다. 인적 드문 병실, 문이 잠긴 연구소, 사람이 떠난 기지, 쓰다 만 건물 같은 곳들. 실제 소설 속 배경도 그런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천선란 작가의 특별함은, 바로 그 쓸쓸한 장소들에서 감정과 관계의 가능성을 끌어올린다는 점에 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잃어본 사람들이다. 어떤 인물은 기억이 비어 있고, 어떤 인물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고, 또 어떤 인물은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상실의 지점에 가만히 멈춰 있지 않는다. 잃어버린 마음을 끌어안은 채, 아주 작게라도 앞으로 나아가 보려 한다.

무너진 세계 속에서도 누군가를 이해해 보려는 움직임, 자신과 타인을 연결해 보려는 시도가 서사 전체의 온기를 만든다. 나는 특히, 이미 많은 것을 잃었음에도 누군가의 작은 관심 하나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장면에서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크게 소리 내어 울지도 않고, 인생이 극적으로 뒤집히지도 않는데, 그 조심스러운 몸짓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천선란의 문장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크게 선언하지 않고, 옆자리에 조용히 앉는 말투에 가깝다. 비유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고, 때로는 시집의 한 구절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상처를 이야기하면서도 독자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아픈 부분을 콕 찌르기보다, 그 주변을 천천히 감싸 안는 느낌에 가깝다.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문장들이 유난히 깊이 들어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책을 덮은 뒤에도 “혼자인 줄 알았는데, 나만 그런 건 아니었구나”, “아무도 오지 않는 줄 알았던 자리에도 여전히 삶이 남아 있구나” 같은 생각이 마음 한쪽에 오래 머문다.

외로움이 아닌 ‘존재의 자리’를 묻다

이 책 속 인물들은 그저 외롭기만 한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이 어디에 속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세상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그들을 안쓰러운 대상으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자기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인상적인 건, 이 인물들이 끝까지 선택의 여지를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처가 깊고 환경이 척박해도, 완전히 포기한 상태로만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는 새로운 연결을 조심스레 시도하고, 누군가는 이전과는 다른 길을 살짝 엿본다. 천선란이 만든 세계에는 완벽한 구원도, 막막한 절망도 없다. 그 사이 어딘가, 애매하지만 현실적인 지점에 인물들이 서 있다.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그래서 오히려 더 위로가 된다.

예를 들어, 기억을 잃은 존재가 ‘예전의 나’를 되찾으려 애쓰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과거를 되찾는 일보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가는 일이 훨씬 어렵고, 어쩌면 더 솔직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소외된 존재가 누군가와 아주 미세한 감정 교류를 나누는 순간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지나쳐 버리는 ‘나도 여기 있다는 신호’를 떠올리게 한다. 이름 없이 스쳐 가는 존재들이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피워내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 정도면 나도 꽤 잘 버티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가 건네는 “당신도 충분히 괜찮다”는 확신은 큰소리가 아니라, 속삭임에 가깝지만 오래 남는다.

천선란이 펼치는 생명과 상상력의 결합

천선란의 작품을 두고 흔히 ‘감성 SF’라는 말을 많이 한다. 맞는 말이지만, 그 한 줄로는 설명이 다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역시 그렇다. 과학적 설정과 상상력이 분명 바탕에 있는데, 그 위에 인간의 감정, 존재의 고독, 관계의 의미 같은 것들이 여러 층으로 쌓여 있다. 장르적 재미와는 다른 종류의 깊이가 느껴지는 이유다.

이 소설집 속 이야기는 설정만 보면 굉장히 다채롭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에 선 존재, 변형된 생명체, 이름조차 낯선 공간. 그런데 결국 중심에 있는 건 언제나 ‘사람’이다. 약한 존재, 사회에서 비켜난 존재,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들이 어떻게 하루를 버티고, 누구와 연결되며, 무엇을 통해 겨우 회복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천선란의 글쓰기를 두고 ‘상상력으로 생명을 기록한다’는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기계든, 인간이든, 그 사이 어딘가에 선 존재든, 그녀의 시선은 결국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닿아 있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들이 등장하는데도, 그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안도감은 이상하게 익숙하다. 나는 그 낯섦과 익숙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순간에 가장 크게 마음이 흔들렸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이 지점에서 비슷한 위로를 받지 않을까 싶다.

결국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는 너무 시끄러운 세상에서 잠깐 벗어나, 자기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한 편 한 편을 읽다 보면, 우리가 바쁘게 지내느라 잠깐 잊고 있었던 ‘존재의 의미’와 ‘살아 있다는 감각’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