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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페스트' (무기력, 연대,매일 같은 일상)

by 달려라피터팬 2025. 12. 30.

알베르 카뮈 - 페스트
알베르 카뮈 '페스트'

 

 

-코로나와 연관된 내용일것 같아서 읽어보게 되었다. 사회의 패닉과 공포는 어떻게든 해결해보겠다는 의지보다는 막연한 불안에서 시작된다. 그 시대에 이런 글을 썼다는게 참 특별해보인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전염병이 퍼진 도시를 그린 이야기다. 겉으로 보면 재난 소설처럼 보이지만, 읽다 보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병 그 자체보다, 그 시간을 통과하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하루가 반복되고 감각이 무뎌질 때, 세상이 지나치게 조용하거나 반대로 너무 요란하게 느껴질 때, 이 소설은 느닷없이 정신을 붙잡는다. 지금 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유다. 어쩌면 여전히 필요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무기력 속에서 자꾸 이 책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기운이 바닥나 있던 시기에 이 책이 생각났다. 뉴스를 틀면 바이러스라는 단어가 귀에 박히던 때였다. 책장에서 오래 꽂혀 있던 '페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학창 시절에 줄거리만 외우듯 알던 책인데, 그날은 괜히 손이 갔다.

몇 장 넘기지 않아 중얼거리게 됐다. “이거, 우리 얘기잖아.” 도시가 닫히고, 사람들은 상황을 애써 축소하거나 과장하며 하루를 견딘다. 확실하지 않은 낙관에 기대고, 불안을 외면한 채 버틴다. 낯설지 않은 장면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런데 카뮈는 공포를 키우는 쪽으로 가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오래 바라본다. 자기만 살겠다고 등을 돌리는 사람,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사람, 감정을 눌러 관찰자로 남으려는 사람. 봉쇄된 공간에서 인물들은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읽는 동안 마음이 묘하게 무거워졌다. 동시에, 아주 조금은 가벼워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특별하지 않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이전에도 비슷한 시간을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일부는 끝까지 자기 몫을 해냈다는 사실이 남았다.

요즘처럼 매일이 비슷하게 흘러갈 때, 이 소설은 더 깊이 스며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날들 속에서도, 사실은 무언가를 붙들고 있다는 걸 이 책은 조용히 짚어준다.

카뮈가 말하는 ‘연대’는 거창하지 않다

'페스트'는 늘 철학적인 작품으로 분류된다. 부조리, 실존, 책임 같은 말들이 따라붙는다. 그런데 막상 읽고 있으면, 이 소설은 놀랄 만큼 현실적이다. 거창한 선언 대신 아주 구체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리외는 영웅이 아니다. 특별한 신념을 앞세우지도 않는다. 그는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한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환자를 보고, 함께 일할 사람들과 자리를 나눈다.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선택을 반복한다. 그 반복이 이야기를 버티게 만든다.

카뮈는 리외를 통해 묻는다. 도망치지 않는다는 건 무엇일까. 연대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무너진 일상 속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 대목에서, 이유 없이 마음이 풀렸다.

“나 하나쯤은”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자주 우리를 물러서게 하는지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페스트'는 그 하나가 모여 도시를 떠받친다고 말한다. 병을 완전히 이기지 못해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의미는 남는다고.

이 소설이 주는 위로는 말보다 감각에 가깝다. 함께 버티고 있다는 느낌. 세상이 엉망이어도, 사람은 여전히 사람 곁에 설 수 있다는 사실. 읽는 동안, 나를 짓누르던 무기력도 조금씩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매일 같은 일상, 그 안에도 싸움은 있다

책을 덮고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이야기 자체는 담담한데, 여운이 오래 갔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답은 단순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안에도 싸움이 있다는 메시지 때문이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극적인 선택을 거의 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신의 뜻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떠난다. 또 누군가는 남는다. 특별하지 않은 결정들이 겹쳐 도시의 방향을 만든다. 리외와 타루 같은 인물들이 끝까지 버텼기에, 오랑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 책은 외치지 않는다.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다. 당신의 하루에도 의미가 있다고. 마스크를 쓰고 출근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와 잠드는 날들.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것 같아도, 사실은 포기하지 않고 있는 중이라고.

그 태도가, 어쩌면 누군가의 하루를 조용히 지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남는다.

'페스트'는 잊고 있던 연결감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지금도 다시 읽히는 게 아닐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대단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매일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을 고요하게 따라간다.

반복되는 하루가 공허하게 느껴질 때, 이 책은 우리가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슬쩍 상기시킨다. 설명 대신 침묵에 가까운 문장으로. 묵직하지만 과장되지 않은 그 온도가, 생각보다 오래 곁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