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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시선으로부터(이야기, 목소리,남겨진 질문)

by 달려라피터팬 2026. 1. 1.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 시선으로부터

 

 

정세랑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장례식으로 시작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는 죽음보다 삶에 가깝다. 이별보다는 연결 쪽에 서 있다. 여러 인물의 목소리가 겹겹이 쌓이면서, 한 사람을 다시 불러내고, 그 사람을 통해 사회에 남겨진 질문들을 건드린다. 지금 이 책이 자꾸 읽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그 질문들 앞에서 우리가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아닌 ‘시선’으로 시작된 이야기

'시선으로부터'는 흔히 떠올리는 장례식 소설과는 결이 아주 다르다. 슬픔을 앞세우지도 않는다. 대신,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따라가며 남겨진 사람들의 현재를 보여준다. 시선이라는 이름의 인물은 소설 내내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매 장면마다 그녀가 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야기는 시선의 가족들이 그녀의 유해를 하와이 바다에 뿌리러 가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그 길 위에서 각자는 시선을 기억한다. 그녀와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이후 조금 달라진 자기 자신을 말한다. 누군가는 따뜻하게,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또 누군가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으로.

인상적인 건 시선이 어떤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불완전하다. 때로는 멀게 느껴지는 엄마였고, 가족을 아프게 한 선택도 했다. 동시에 누구보다 자기 삶에 충실했고, 주체적으로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 모순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사람은 늘 한 얼굴로만 기억되지 않으니까. 그 복잡함이 이 소설을 붙잡게 만든다.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여러 개의 목소리

이 소설의 구조는 확실히 독특하다. 한 명의 화자가 끌고 가지 않는다. 가족, 친구, 동료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시선을 이야기한다. 그 목소리들이 겹치면서 한 사람의 삶이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이 방식이 좋았던 건,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읽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투, 사용하는 단어, 감정을 다루는 방식까지 인물마다 다르다. 그래서 읽다 보면 소설이라기보다 여러 편의 짧은 기록을 엮어 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시선을 기억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존경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이도 있고, 아직 상처로 남아 있는 이도 있다.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하게 됐다고 말하는 목소리도 있다. 정세랑은 이 감정들을 하나로 묶으려 하지 않는다. 설명하지도, 화해시키지도 않는다. 그냥 그대로 둔다. 그 태도가 오히려 더 솔직하게 다가온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할 수 있고, 존경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싶을 수 있다. 이 소설은 그런 감정의 겹침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더 현실 같다.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들

'시선으로부터,'는 질문을 정면으로 던지지 않는다. 대신 책을 덮고 나면, 오랫동안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나는 어떤 시선을 남기고 있을까.
내 가족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끝내 말하지 못한 감정들은 어디로 갈까.

이 질문들은 시선을 둘러싼 인물들의 회고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특히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딸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오래 남는다. 시선은 페미니스트였고, 운동가였으며, 동시에 자식에게 충분히 다정하지 못했던 엄마였다. 성공과 실패, 온기와 냉기가 한 사람 안에 함께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중요하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에,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사실이 묘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시선 아래 살아가고 있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시선을 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말보다 오래 남는 건, 어쩌면 그런 시선일지도 모른다.

'시선으로부터'는 화려하지 않다.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대신 문장마다 조용한 무게가 있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특정 장면보다, 기억이 쌓이는 방식 자체가 오래 남는다. 여러 목소리가 만들어낸 한 사람의 초상, 그 안에서 흔들리는 감정들.

이 소설은 완결된 대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이런 제안처럼 느껴진다.
지금, 당신은 누구의 시선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당신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